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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최 레안드로와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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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성명: 최 레안드로 빅또르
ㅇ거주지: 추붓 주, 에스껠
ㅇ가족: 아버지 최병기, 아르헨티나인 어머니: Teo Silvero, 형이 2명이 있음.

당신의 가족과 어린 시절에 대해 좀 이야기해 줄 수 있는가.

- 아버지는 한국인이고 어머니는 아르헨티나인이다. 아버지는 1978~79년 대략 22살 때 이민을 오셨다. 어머니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알게 되셨고 거기에서 내 형들과 내가 태어났다. 내가 1살 때 아버지는 전국으로 여행을 다니셨고 바릴로체 가까이에 있는 에스껠이라 불리는 동네를 찾아내셨는데 그 동네는 그제서야 성장하기 시작했었다. 아버지는 그곳의 농어업 및 관광활동에서 어떤 잠재력을 보셨고 게다가 거기에는 상점들도 많지 않았었다. 그래서 거기가 바로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발전하기 위한 곳이라고 말씀하셔서 가족의 생활형편을 향상시키자는 결정을 내려 우리는 거기로 이사했다. 우리는 승객운송열차였던 뜨로치다(trochita)를 타고 그곳에 다다랐다. 나는 한국어를 다 이해하지만 말을 조금밖에 하지 못 한다. 집에서 한국어를 많이 쓰지 않았었고, 반경 수백 킬로미터 이내에서 우리 가족이 유일한 한국인이었던 그 동네에 있으니 더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당신의 직업적 발전에 결정적인 사람이었는가?

- 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것은 가만히 있지 않는 것, 항상 무언가를 하려고 찾고 잘 하고 중도에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가족으로서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셨다고 생각되는 것은 밑바닥부터 시작하여 조금씩 이루어나가는 것이다. 우리가 그럭저럭 잘 되고 있을 때에는 가게를 하나 가지게 되었었고 우리 가게는 동네에서 가장 큰 것이었다. 하나 기억나는 것은 내가 7살 때 우리 가족이 부활절에 교회에서 나오는데 시내에서부터 오는 검은 연기를 봤다. 우리 가게가 불에 타고 있었던 것이었다. 보험이 없었으므로 거기에서 0도 아닌 마이너스 10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었다. 아버지에게서 배운 다른 교훈은 “여러 바구니에 달걀을 놓는다”였다. 아버지는 빠따고니아의 여러 지역에 가게를 열기 시작하셨고 전자제품, 양어장, 호텔, 운송과 같은 각기 다른 업종으로 사업을 확장해 나가셨다. 나는 어릴 적부터 많은 한국 아이들처럼 가게를 도우면서 성장했고 많이 힘들었다. 가끔은 15살의 나이에 방과 후 산 사이를 다니며 뒤죽박죽된 물건을 배달해야 했었다. 또 하나의 교훈으로 남은 것은 대략 그 나이에 호주에 교환학생으로 갔었던 일인데 원래는 더 커서 갔어야 하는 것이었다. 아르헨티나에서 갔었던 다른 학생들은 모두 17살이나 18살이었었다. 나이차이가 조금 밖에 안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나이 때에 성숙함은 확실히 차이가 난다.

관광에 대한 당신의 관심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 에스껠에서 학교를 마치고 UBA대학교에서 경영학과, UADE대학교에서 관광학과를 공부하려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왔다. 경영학을 공부하고 있었을 동안에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확실히 정하지 못했었지만, 관광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곱절효과로 사람들을 도울 가능성을 가진 방계활동의 특징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매우 작은 동네에서 살 때에 이것을 많이 본다. 예를 들어, 경기가 안 좋으면 친구의 엄마가 운영하는 미용실은 잘 되지 않았었다. 한타바이러스의 사례가 있는 철에는 관광객들이 찾아오지 않아서 도시에 돈이 들어오지 않았었다. 유엔의 국제관광기구에 따른 관광의 정의에 대한 영화를 봤을 때는 대학의 첫 수업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스크린에서 본 그것이 나의 관심을 끌었다. 이 기구는 관광지사들을 관리하고 관광활동들의 성향과 대의를 제공하며 책임 있고 접근 가능한 관광을 대변한다는 설명을 들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연구를 하기 시작했고 나 자신도 모르게 한 목표를 정했다. 바로 그곳에서 일하고 싶었다. 문제는 같은 일을 하고 싶은 나와 같은 청년들이 수 천명이라는 사실이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이미 마음에 있었고 30살이나 40살에는 어쨌든 목표에 도달할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공부를 계속 했고 그런 중에 여러 일을 했다. 짐꾼, 텔레마케터, 웨이터 등등 각각 특이한 경험들은 재미는 없었지만 생활에 도움은 되었었다. 나는 초등학교 아이들의 과외선생으로도 일했고 잘 되고 있었다. 한 때는 라틴아메리카 6개국을 다니면서 여행을 했고 이 여행은 나를 깨웠다. 국제관광기구에서 일하고 싶어했던 그 생각은 어떻게 된 것인가? 이제는 관광 쪽에서 일하지도 않았었다. 그리하여 안락한 지대를 그만 두고 정해진 것도 없이 일을 그만두었다. 국제관광기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어떠하였는지, 무슨 지식을 가지고 있었는지, 성향의 주제는 무엇이었는지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 관광부(이전의 관광부처)는 명예협력자를 모집했다. 3개의 일자리에 지원자는 너무 많았고 나는 텔레마케터와 짐꾼의 경험으로 남게 되었다. 결국에 그 일자리들은 나에게 유용했었고 매우 지루했었지만 나는 자리를 확고히 하고 싶었다. 나와 같이 입사한 다른 두 청년은 1주일 만에 그만 두었고 나는 전화를 하면서 그들의 몫까지 해냈다. 테스트기간이 끝났을 때 정식으로 입사하는 데에 나는 고용되지 않았고 자리가 없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하지만 이전과의 차이는 이제 그들은 나를 알았고 나는 그들을 알았으며 그들의 연락처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거기서 일하게 입사해야 한다고 되뇌였다. 1주일에 메일을 1개씩 썼었고 관심이 될 만한 제품을 보냈었다. 나는 약 6개월간 끈질기게 있었고 그들은 지쳐서 내가 일할 자리가 공석이었다고 말하기에 이른 것 같았고 나는 그 자리에 남게 되었다. 첫 출근하는 날 의욕에 차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바닥부터 천장까지 책장으로 되어 있는 크고 더럽고 엉망인 방으로 나를 데려갔다. 그들은 나에게 그 곳을 서두를 것 없이 정리하라고 말했지만 나는 나흘 만에 정리를 끝냈고 그들은 믿을 수 없어 했다. 나는 무엇을 더 해야 하느냐고 물었고 그들은 어안이 벙벙해 있었다. 그 다음에 할 일을 생각해 놓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서류의 출납을 기록하는 다른 일을 주었는데 나는 파일이 수북이 쌓인 항상 텅 빈 책상이 있었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것은 거기에서 더 이상 일하지 않는 여성 변호사가 하곤 하던 일이었고 여행사 명의변경과 관계된, 아무도 하고 싶어하지 않은 일이었다. 내가 그 일을 한다고 했고 그 일을 처음 했을 때는 매우 힘이 들었지만 나중에는 기계적으로 되어서 나는 다시 싫증이 났다.

당신은 가만히 있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국제관광기구에 들어갔는가?

- 중국관광에 관련된 일을 돌보지 않고 있던 프로그램이 있었다. 여행사는 그 관광객들을 받기 위해 일정한 규율을 지켜야 했고 등록을 하고 명부에 절차를 해야 했었다. 나는 이 일을 받아들였고 모든 행정적 절차들을 시일에 맞춰 해 놓았고 나중에는 여행사가 아무도 돌보지 않았었던 문제와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나는 여행사와 연합회 및 관계기관들과 모임을 가지기 시작했고 아르헨티나에서의 중국관광의 현실에 대한 스케치를 만들어 나갔다. 때를 같이 하여 관광부의 민간행정처에서 메일을 보내 왔는데, 중국의 관광부가 4명의 간부를 데리고 올 것이며 내가 그 모임에 참석하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내가 알아차릴 새도 없이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그 모임 후에 그들은 나를 상하이와 베이징에 초청하였고 귀국 후 1주일이 되자 아르헨티나 관광진흥청이 나한테 전화를 하며 한국 여수 엑스포에 참석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 나는 거기에서 아르헨티나 관광코너의 관리자가 되었다. 나를 전세계의 각 방면의 간부들과 사람들과 일할 수 있게 한 매우 좋은 경험이었다. 그 당시에 나는 좀 자만해져 있었는데 관광부에서 일하게 되었고 여행에 참가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에서 나보다 어린, 석사과정을 공부하였거나 중한 직책을 맡고 있었던 젊은이들을 알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은 나를 단번에 현실에 떨어지게 했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돌아와서는 타이완, 스페인, 한국, 미국과 같은 여러 나라에서 관광학을 마스터하는 공부에 매진했다. 미국에서의 공부는 매우 중요했었는데 명성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 관광학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교수가 강의를 했기 때문이다. 수업 첫날 쉬는 시간인 커피브레이크 동안에 국제관광기구 총장의 보좌관으로서의 그의 업적을 칭찬하면서 그에게 다가갔고, 게다가 거기에서 일하고 싶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당장 그날 스카이프(skype)로 3개의 인터뷰를 가졌고 일자리가 있다는 통보를 받았는데 그 달이 가기 전에 일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공부를 끝냈을 때 돌아와서는 다시 갈지 남을지를 결정할 1주일 반의 시간을 가졌다. 그것은 나의 큰 꿈이었고 그래서 국제관광기구에서 일하러 스페인에 갔다. 기구에 대해 많은 꿈을 가진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에 나는 도착해서 그곳의 관료주의에 조금 실망했다. 어쨌든 매우 좋은 경험이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는 거기에서 직업적인 성장의 끝에 도달했었고 허공에 또 다른 뜀질을 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때 아버지가 실명의 위험을 안고 수술을 하려던 참이어서 나는 돌아왔고 남게 되었다.

얼마 전에 당신의 프로젝트(COLABTUR)가 관광부의 중요한 상을 탔다. 그 아이디어를 어떻게 갖게 되었는가? 프로젝트와 프로젝트의 목표에 대해 말해 달라.

- 내가 돌아왔을 때 2개의 컨설팅회사에서 일자리 요청이 들어왔다. 그리고 민간업체에서 그렇게 일하면서 남게 되었는데 내가 아직 해 보지 않은 일이었다. 국제관광기구에 가장 크게 관계된 컨설팅회사들 중의 한 회사에서 국제관계문제를 담당했고, 회사의 총관리자가 되어 그 회사의 간부들과 좋은 관계를 만들었다. 기획과 개발에 대해 많이 배웠는데 이는 작년까지 항상 나의 관심사였던 일이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직업적 평지에 들어갔고 거기에서 개인적인 비전이 갈수록 회사의 비전과 멀어지게 되어 COLABTUR가 생겨난 것이다.

내가 공부할 때 나한테 생긴 것이 있는데 그것은 관광활동에서 보통의 일보다 다른 일을 원하는 것이다. 우리가 관광에서 일할 때 우리에게 생기는 일은 사람들은 우리를 호텔이나 여행사에서의 일과 동일시하거나 어디에서 저렴한 표를 구할 수 있는지를 문의한다. 우리는 대학에서 4년간 힘들게 공부하고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은 데스크 뒤에서 호텔의 안내에서 또는 여행사에서 전화를 받으면서 끝이 난다. 이건 전혀 나쁘지가 않은데 이 모든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학교는 기본적으로 우리가 여행지를 계획하도록 준비시킨다. 사람들의 날마다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해결책을 생각하도록 준비시킨다. 왜냐하면 관광활동은 단지 방문자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지역 주민의 삶의 조건을 개선할 수 있는 과정에 깊숙이 관여되어 있어야 한다. 내가 당신의 마을에 가서 내가 술에 취해 당신을 잠들게 놔두지 않는다면 당신에게 좋은 일이 아니다. 그러니까 관광활동이 당신의 마을에서 제대로 된 방법으로 발전되고 당신에게 경제적으로 좋게 되고 당신의 일상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흔하게 일어나는 것은 목적지들이 될 수 있다면 자발적인 방법으로 생기고 그렇게 되어야 좋다. 보통의 경우는 해변가의 목적지인데 거기에 건물을 세워서 오후 4시에는 해가 더 없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목적지들이 가지고 있는 이 문제와, 다른 한편으로는 관광에 종사하는 우리가 전통적이지 않고 우리의 지식을 가치 있게 할 수 있는 다른 활동에서 일하거나 관계된 문제는, 어떤 면에서 직업을 등급을 매기자면 종종 매우 퇴화되고 있다. COLABTUR는 그 두 가지의 문제에 해결책이다. 작은 목적지, 관광을 개발하기에 재정적 또는 인적 자원이 없으나 재미를 더해주는 대중파티, 호수, 숲, 작은 길 등 보여줄 수 있는 재미있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돌발적인 목적지를 돕는다. 우리는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이끄는 과정의 경험이 아닌, 지식을 가진 이 젊은이들을 고용하여 목적지들에 대해 기술적 보조를 한다. 그리하여 다른 방법으로는 여기에 도달하지 않을 이 젊은이들은 여러 사람들을 알기 시작하고 그 이익을 돌발적인 관광지로서 만들어내지만, 결국에는 자연재해를 당한 관광지들처럼 이미 관광개발이 되었지만 나쁜 결과를 갖게 된 성장된 관광지들도 만들어낸다. 한 나라에 무슨 일이 생기면 모두가 도와주러 가고 싶어한다. 정당의 유니폼을 입고 또는 고무장화를 신고 말이다. 하지만 관광지들의 문제는 2, 3개월이 지나고 지원이 더 안 오면 관광지를 그만 접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정치적인 것이 가버리면 경제적 재활성화를 도울 수 있는 것처럼 관광활동을 통해 도와주러 우리가 들어가는 것이다.

당신들이 COLABTUR 안에 포함시키도록 누가 정보를 제공하는가? 어떻게 운영되는가?

- 처음에는 능동적인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이제 시작하는 신출내기 플랫폼이어서 첫 목적지를 얻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한 도시의 시장에게 당신의 도시에서 관광을 하는데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들과 같이 간다고 말한다고 상상해 보라. 더 이상하게 들리는 것은 그것을 함으로써 돈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고, 이것은 우리는 갈 것이지만 돈을 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엉터리의 일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할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도전적이었다. 하지만 다른 이의 추천이 생기고 우리가 하는 일을 보여주고 시장에 관련되었다고 말하는 처음의 테스트들을 통과하니 일이 쉬워졌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가고 싶어하는 잠재력 있는 세 곳을 정하기 시작했고 세 곳 모두 잘 되었다. 그런 후에는 옆 마을을 도우러 가라고 말했었던 시장들의 추천들을 통해서였다. 흥미로운 다른 일은 구조 내에서 협력하는 사람들은 전국의 사람들이었고, 그들의 네트워크였다. 여기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지만 사실은 타지의 사람들이고 그래서 열의를 보이고 우리에게 각자의 마을로 가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작은 노력이 내년에 일이 많이 생기게 했다. 보통의 컨설턴트는 1년에 4~5개의 일을 하는 반면, 우리는 1년의 상반기에 이미 확정된 18개의 목적지가 있다. 누가 COLABTUR의 구성원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COLABTUR는 소셜 인노베이션 연구소이고, 한 정해진 문제에 해결책을 줄 수 있는 여러 유형의 경험을 가진 사람들을 데려오는 플랫폼이다. 먼저 이 처음의 시작 단계에서 가진 특성은 COLABTUR는 주로 관광의 주제에 초점을 맞추며 그래서 우리에게 오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전문인들은 관광의 세계와 관련되어 있다. 좀 더 영역을 확장하고 여러 계층의 전문인들이 더 가까이 할 수 있어서 실질적으로 개방된 소셜 인노베이션 연구소가 되는 취지를 가지고 있다. 우리의 가장 큰 희망은 지역적 정립 계획을 하는 것인데 이는 매우 어려운 작업이고 많은 사람들의 경험을 필요로 한다. 오늘날 우리는 전략, 마케팅계획 등 그런 유형의 모든 문제들에 대해 일하고 있다.

당신들은 관광부의 상을 받았다. 프레젠테이션은 어떻게 했고 프로젝트의 수준은 어느 정도였는가? 상을 받은 후에 어떤 프로젝트가 있는가?

여행을 위한 혁신대회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의 큰 등급, 아이디어, 프로젝트를 가지고 있었다. 내 프로젝트는 참가등록 시 확실히 시작된 게 아니었고 몇 달 후에는 이미 지역에서 촬영을 했고 작동을 검증받았었다. 그리하여 기본적으로 이미 존재했었던 것이었기에 대회의 일부는 자금이 필요하다는 것과 그 자금을 어떻게 사용할지를 말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플랫폼에 투자를 할 것이고 월급을 지불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설령 금액이 꽤 된다 해도 그 돈을 월급에 사용한다면 반년밖에 가지 않을 것이다. 이 금액은 우리의 정보시스템을 개선하고 협력작업을 가능케 하는 데에 사용될 것이다. 현재 우리는 페이스북, 왓섭, 메일, 개인모임들의 그룹들과 일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모든 것을 플랫폼에 주력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서 우리가 발전할 수 있게 한다. 오늘날 왓섭그룹을 통해 3~4개의 여행지에 대해 동시에 일할 수 있다. 전화기를 열어보면 읽지 않은 메시지가 3만개가 있다. 페이스북에 들어가면 나는 항상 소식이 있다. 나는 이를 일일이 확인해야 하고 그게 나의 일이다. 하지만 나중에 10개를 동시에 일하면 이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 많은 주제들의 조합이다. 그래서 테크놀러지를 통해 정리할 것이다. 나중에는 플랫폼을 제도화하기 위해서 돈은 프로모션으로 사용될 것이고 이는 우리의 큰 도전이며, 우리가 신임을 더 얻게 됨에 따라 협력자들을 더 모을 수 있을 것이고 더 많은 여행지에 도달하게 되어, 끝내는 지역에서의 업무적인 부분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음식 등을 충당해야 하면 이를 위해 자금을 쓸 수 있는 것이다.

COLABTUR는 몇 명의 인원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 내부구조에 정원이 7명이고 거기에서 네트워크가 확산된다.

이 모든 경험을 바탕으로 당신 기사를 읽고 있는 한인 청년들에게 무슨 충고를 줄 수 있는가?

- 무엇보다도 희생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단지 바라는 것으로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목적이 무엇인지, 무엇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가이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잘 할 수가 없다. 성취하고자 싸우면 그것을 얻을 뿐만 아니라 일이 잘될 것이다. 아무도 당신에게 거저 주지 않으니 당신이 알고 있는 이상의 것을 원한다면 끈질기게 하라. 그 어느 누구도 당신 가족도 당신을 알지 못한다. 당신이 어디 출신인지 상관없이 자신이 알아서 가치를 높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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