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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철학가 최도민 교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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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교(UBA) 철학과 예술 학부, 국립예술대학교(UNA) 및 영화대학교(FUC) 등에서 강의를 맡고 있는 최도민 교수는 다수의 저서를 집필하고 이 시대의 철학가 및 예술가로 아르헨티나 현지에서 존경받는 인물이다. 다음은 현지 잡지에 실린 최 교수의 인터뷰


○“옛날 옛적 헐리우드에서”는 El fin de lo nuevo(새로운 것의 종말)에서 분석한 여러 작품들의 특징을 갖고 있는데 그 영화에서 무엇을 보았나?

타란티노는 선호하는 감독은 아니지만 그는 현대 영화와 현대를 이해하기 위한 결정적 인물이다. 그는 포스트모던 범주에 속하며 “자기 복제 영화”, 또는 과거를 재단장하는 작품을 계속에서 촬영한다. 그러나 그는 “누벨바그” 세대같은 영화적 사조와는 역사적으로 차이점을 보인다. 고다드는 그와 타란티노의 차이점에 대해 질문을 받자 다음같이 대답했다. “내 안에는 영화의 역사가 살아 있는 반면 그는 영화의 역사 속에 살고 있다”. 이는 타란티노가 일종의 비디오클럽 속에 살고 있는 동안 고다드에게는 영화가 역사적 경험이라는 것이다.

다른 한 편으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은 옛날 옛적 헐리우드에서가 무엇에 관한 영화인가, 이다. 먼저, 정치적인 면을 배제할 수 없다. 유권자들에게 외양적인 제안만 하면서 정치는 포기하고 행정과 경영에만 집중하라는 자유방임주의 사상이 존재한다. 이러한 정치적 경향에 더해 타란티노만의 사상이 추가된다. 영화는 두 인물에 관한 이야기인데 결정적 인물은 브래드 핏이다. 그는 자신이 주인보다 더 똑똑하다는 것을 잘 아는 주인 같은 노예다. 반대로 디 카프리오는 징징거리기만 하는 허울좋은 영웅이다. 내가 분석하고 싶은 장면은 오래된 친구를 방문한 자리에서 히피들이 자동차 타이어를 펑크 내자, 브래드 피트가 “이 차는 내 주인차란 말이다”라고 말하며 몽둥이질을 하는 것이다. 그는 트레일러에 살면서 할리우드의 백만장자를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타란티노는 이를 통해 60년대의 반문화적 현상을 되짚고 있다. 영화는 자본주의의 핵심이랄 수 있는 할리우드에서 살아남지 못한 이러한 반문화를 공격하는 것이다.


○“영화는 갈수록 부진하고 넷플릭스 식 드라마 시리즈만 가능성이 보이는 이러한 문화적 소비 현상은 어떤 중요점이 있는가?”

우리는 정보화 시대에 살고 있으며 비주얼 아트는 어떻게 이러한 정보화 사회에 스며들었는지, 자유주의 잠재력은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 21세기의 걸작들은 드라마 시리즈다. 매드맨, 더 와이어 등이 그렇다. 오늘날 많은 이들은 알고리즘과 이로 인해 만들어진 작품들을 비판한다. 알고리즘이 모든 것을 규정한다는 생각이 존재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기술적인 면을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특징이다. 오늘날 관객과 플랫폼 사이의 빠른 피드백 속도는, 플랫폼이 과거 영화시절 보다 더 빨리 관객의 요구를 받아들여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게 한다. 넷플릭스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시청하고 중단하는지 등의 정보를 모두 파악한다.


○“새로운 기술의 범람 시대에 창작자들은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창작자는 기술적 도전을 받아들이고 이를 넘어서야 한다. 오늘날 예술가의 도전은 정보화와 반대로 가는 것이다. 문제는 정보 집중과 자본집중이 함께 간다는 것인데 예술가들은 이러한 정보화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해야 한다.

아론 소킨의 “머니볼”을 예로 들면 약자를 위해 정보를 활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정보는 공공적이어야 하는데 문제는 이것이 사기업의 손에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래서 해킹에 기대를 걸고 있다. 21세기의 반항자인 해커는 “미스터 로봇”이라는 최근 작품에 잘 나타나고 있다.


○“책은 예술의 생산 과정과 형태를 뚜렷하게 구분하고 있다. 시장자본주의는 고전 영화에 속하며 독점주의는 현대 영화, 다국적주의는 포스트모던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그 후에는 무엇이 등장할 것인가?”

오늘날 인문과학은 큰 위기에 처해 있다. 이는 문화와 예술이 역사의 방향을 바꾸는데 큰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옛날 옛적 할리우드에서”를 장 자무쉬의 마지막 작품 The Dead Don’t Die와 비교하고 싶다. 인간이 지구에 치명적 손상을 입히는 동안 허구와 영화는 이를 막기에 무기력한 반면, 타란티노는 픽션을 통해 계속 역사의 방향을 바꾸려 시도한다. 현실주의 시대였던 19세기에 통치자들은 코르벳이 어떤 그림을 그릴지 두려워했지만 오늘날 정치권력은 예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술은 어떤 중요성을 갖는가? 사회적인 면에 있어서 신경과학과 정보과학, 바이오테크놀로지 등은 인문과학의 위상을 재정립하게 강요하고 있다. 사회학자 리포베츠키는 예술이 더 이상 경제에 반하지 않으며 오히려 경제가 예술과 결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예술작품이 하나의 상품이 된 것이다. 반대로 상품이 예술작품이 되기도 한다. “디자인”이 그것이다. 자본주의는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 예술을 이용한다. 이 상황에서 예술은 많은 것을 할 수 없다. 영화도 과거에 비해 역할이 매우 작아졌다.

이는 60년대 시작된 금융자본의 지배력 강화와 반문화의 실패와 연관돼 있다. 현대 영화는 매우 작은 메시지만 전달한다. 타란티노의 포스모던 작품들은 분명한 줄거리를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죽은 시간을 화려하게 부활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질문은 시간과 이미지의 저 뒤에 무엇이 존재하는가,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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